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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이해] 5편 : 중세 미술

| 플라톤의 이데아론

플라톤식으로 생각하면, 고대 그리스 미술은 크게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플라톤의 생각은 현실과 차이는 있었겠지만, 추상적인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유용했을 수도 있다. 이번에는 플라톤 사고에서 바라보자.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모방론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데아 세계는 눈으로 보거나, 촉감으로 만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즉, 인간의 감각의 차원으로 경험할 수 없는 관념적인 세계이며, 따라서 완벽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데아가 아니며, 오감이 다 발달되는 감각의 차원의 세계이다.

미술, 영화, 드라마 K-pop과 같은 예술 영역은 현실과 관계는 있지만, 현실은 아니며, 가상의 차원이다. 그래도 현실과 어느 정도의 관련이 있어야 설득력이 있다. 예를 들어서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현실을 굉장히 잘 반영했지만, 현실이 아니다. 현실인데 현실 아닌 현실 같은 굉장히 설득력 있는 가상이다. 결론적으로 예술은 가상이다.

1) 세 가지 분류 : 이데아 / 현실 / 그림(가상)

이 세 가지 분류에 대한 관계가 중요하다. 이 중에서 순도가 가장 높은 완성도와 질이 높은 것은 '이데아'이며, 현실은 '이데아'를 모방했고, 그림은 '현실'을 모방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모방의 대상은 모방을 취하는 것보다 뛰어나다는 점이다. 즉, 차원이 다른 세계관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이는 근본적으로 '모방론'이며, 모방론이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주었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생각대로 현실이 이루어졌을까? 그렇지 않다. 따라서 철학자의 생각과 현실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플라톤을 통해서 추상적인 사고력을 키우는 데에는 유용하다.

앞의 내용(모방론)을 통해서 개념이 이항대립이 생기게 된다. '무엇이 무엇을 모방한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데아는 진짜, 현실은 가짜라는 이항 대립이 존재하게 되며, 이를 통해 원본이 존재하고, 이를 복제했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플라톤에게는 이데아가 원본, 현실이 복제본, 그림이 현실의 복제본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에게는 원본이 복제보다 더욱 퀄리티가 좋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삶에서 이 개념을 찾아보면 바로 '셀카'를 얘기할 수 있다. 우리는 본모습보다 훨씬 더 퀄리티를 좋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보정도 하고 필터도 쓰는 것이다. 이처럼, 원본과 복제의 관계가 현대로 오면, 기술 혁신 / 사회 변화 / 세계관 변화가 되었다.

|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예를 들어 사람을 향한 '인상'은 본 순간 정해진다.

만찢남, 조각미남과 같은 것들을 보면, 현실을 보면서 가상을 떠오르게 한다는 특징이 있다. 즉, 현실이 가상을 닮았다는 의미를 강조한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고, 살면서 각기 만들어진 필터를 갖고 보게 된다. 이는 우리가 현실을 볼 때,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닌, 뭔가 빚어진 가상의 필터를 갖고 보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사회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이러한 필터를 만드는 것이지 않을까?

현실은 가상과 섞여져 있다. 하지만,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은 뒤섞여져 있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해당 작품은 '찢고 나온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비평으로부터 탈출하는 느낌을 준다.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은 해당 작품이 작품으로써의 가치가 없다고 폄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러한 비평으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 현실 / 가상

현실과 가상은 이분법적인 개념이 아니다. 포토샵에서 레이어를 여러 개 쌓을 수 있듯이, 우리는 '가상' 뒤에 슬래시(/)를 이어 붙일 수 있다. 즉, 가상을 여러 개의 레이어로 쌓을 수 있다.

BTS '뷔'와 같이 가수들이 본명을 사용하지 않고 닉네임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판타지가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판타지는 현실에 근거 없는 것은 아니며, 현실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현실과 가상을 뒤 넘나들며, 이를 통해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콘텐츠를 활용하고는 한다.

현실과 가상 중 무엇이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냐로 볼 것이 아니라, 서로가 상호작용하는 관계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 미술은 이것을 잘 드러내곤 했다.

플라톤은 원본이 당연히 높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원본보다 복제본의 퀄리티가 더 좋은 건 너무 많다.

(이어서 작성해보기)

| 기로에 선 미술 (기독교 공인 이후의 미술)

기로에 섰다는 것은 무언가의 갈림길에 섰다는 것이다. 바로, 세계관이 고대 그리스(다종교)에서 기독교 미술(유일신 사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가 멸망하면서 문명의 주체도 바뀌게 되었고, 그에 따라 미술도 바뀌게 되었다.

패러다임이 찾아오면서 그림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바로 "그림을 꼭 그려야 할까"와 "잘 그려야 할까"였다. 가톨릭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던 이유는 당시에, 문맹인 사람들이 많았기에 믿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고, '있으면 좋겠다'는 식의 장식용이 전혀 아니었다. 오직,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 필요한 매체였다. 또한, 그림들의 완성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기독교를 공인하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작품이 바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인테리어도 다시 하고, 용도도 다시 잡는 식으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위의 사진처럼, 각 건물마다 건축적으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건물 안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해당 작품을 보면 그리스 미술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문명의 주체가 바뀌게 되면서 말이다. 모자이크 기법을 가지고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 과연 이러한 작품이 잘 그려진 것일까? 직전의 그리스 미술에서 보면 못 그렸지만, 이 시대에서는 미술의 의미가 많이 달라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된다.

해당 작품을 보면 어색한 느낌이 확 든다. 조각이 아닌 평면에서 그려졌으며, 이 작품을 볼 때 정면성의 법칙과 단축법을 고려하면서 바라보자.

3차원의 인체를 면에 그리면 어쩔 수 없이 변형을 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시점에 있다. 몸은 정면에서 본 것 같이 그려졌지만, 발은 위에서 본 것처럼 그려져 있다. 즉, 이 작품은 아래에서 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특징을 감안해서 그렸다 하더라도, 이 작품이 사실적이지는 않다. 즉, 이 시대의 경우에는 자연주의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팔을 옷에 넣으면 주름이 잡히거나 부피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부분들이 고려되지 않게 그려졌다.

이 작품에서도 예수님이 자연주의적으로 잘 생겨 보이게 그린 것이 아닌, 내용 전달에 포커스가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잘 그리고 싶다는 의지가 그리스에 비하면 낮아졌다.

테오도라 황후도 이야기가 존재하는데, 이 여인의 이야기를 외모와 같이이 모자이크 만으로는 가늠하기가 어렵다.

해당 그림의 가운데 있는 인물 아래쪽의 파란색 부분을 보면 어떤 것인지 설명이 잘 안 된다. 어색해서 눈에 걸리지만, 중요한 것은 이 포인트가 아니다. 당시에는 어떻게 그렸냐, 무엇을 그렸냐 보다는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가에 더 포커스 되어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이런 식으로 형식이 도식화되어 갔다. 교회가 많아지면서 똑같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자연주의적일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마치 이집트 방식처럼 도식화시켜 버렸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있듯이, 당시에도 방식이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당 작품의 경우에도 상당히 어색함을 준다. 인물의 모습은 좌상인데, 불가능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발의 시점이 높다거나,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렸지만 아기의 얼굴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또한, 계급 별로 사람의 크기를 다르게 하는 것처럼 이집트와 유사한 점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어색한 점으로는 콜로세움 같은 원형이 그려진 배경도 시점이 안 맞는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다시점'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형태감이 조금 떨어지는 대신에, 전반적으로 공통점이 존재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색상이 다채롭다는 점과, 금색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금색은 가장 신성한 색을 의미한다.

중세 시대에 세워진 교회들은 사진처럼 스테인글라스의 창문들이 있었다. 이 창문을 통해서 빛이 들어오고, 성가가 불러질 때 교회 안은 스펙터클해지게 된다. 신성해지며 비현실적인 느낌을 가져다준다.

앞서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위해 그림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개신교의 경우에는 그림을 사용하지 않아 왔다. 즉, 이를 통해 구교와 신교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구교는 그림을 사용하며, 신교는 그림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자연주의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닌, 서화를 그리는 것을 재현하는 것으로 지속이 된다.

특히, 구교가 그림이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로는 당시 사람들의 많은 문맹률이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난 시기에는 활판이 있었기에 찍어내면 되었고 책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림이 꼭 매개를 해주지 않더라도 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바로 개신교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가톨릭은 여전히 그림이 중요해왔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하자면, 어떻게 그렸냐를 집중하기보다는 성경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점이다. 그림을 보지 말고 읽어야 하며, 이후에는 그림을 읽어내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